해원 용치 소진

이인현

아직도 떨쳐버리지 못한 한의 사정을 풀고자
차는 먼저 동두천으로 향한다. 동두천 시내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 미군 부대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이 있다. 주민 K 씨는 시내로 가기 위해 늘 이 언덕을 통과해 내려갔고 부대 안의 모래색 건물과 드럼통, 장갑차, 여러 피부색의 미군들이 모여 농구를 하는 모습을 종종 보았다.
K 씨에겐 부모님으로부터 물려받은 농지가 있었다. 부모님이 열무를 키우는 텃밭으로 사용하던 것을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그 자리에 음식점과 주택을 함께 지으려고 결심했다. 시내에서 임대로 운영하는 오리전문점이 순풍을 만난 듯 잘 되었고 외곽에 주차가 편리하고 넓은 규모로 건물을 짓더라도 그곳으로 손님들이 충분히 찾아오리라는 계산이었다.
그러나 동두천시에 낸 허가는 반년 만에 반려되었다. 주한 미군 부대 사전협의 지역이며 마을의 토지가 미군에게 공여된 상태라는 답변이었다. 수십 년간 부모님이 등기를 놓고 잘 쓰던 땅에 웬 날벼락인지! 이듬해 K 씨는 다시 미군부대가 보이는 언덕을 돌아 자신의 농지로 향했다. 건축 허가는 지지부진했고 건축이 안 된다면 임시라도 열무밭을 부칠 요량이었다. 여름이면 시원한 열무를 수확하여 김치를 담가 먹으리라. 땅의 입구에 차를 댄 K 씨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높이가 수 미터에 달하는 자신의 허리 만치 오는 궤도를 두른 흉악한 미군의 탱크와 장갑차 8대가 자신의 땅에 놓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탱크와 장갑차의 표면은 아주 낡았고 듬성듬성 놓여 있어 당장 활용될 것이라고 보이기 보단 마치… 버려져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K 씨는 나지막이 소리내었다.
"마더퍼커. 내 땅에 무슨 짓을 한 거야."
탱크와 장갑차에 관해 신고를 했지만 경찰이나 미군이나 답이 지지부진했다. 알고보니 주민들 몰래 추진되는 계획이 있었다. 인근에 미군 사격 훈련장이 들어설 예정이었다. 가져다 놓은 탱크와 장갑차는 포격용 훈련 타겟이었다. K 씨는 텃밭을 매던 자신의 가족들 머리 위로 포탄이 쏟아지는 장면을 떠올렸다. 그날로 마을 사람들을 모아 시청 앞에 텐트를 치고 농성에 들어갔다. 그러나 이렇게 변변한 무기조차 없는, 동학농민군과 무장 상태가 다를바 없는 우리가 탱크와 장갑차를 몰고 오는 미군을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 K 씨는 절박했지만, 또한 전략적이었다. 그는 마을 사람들을 모아 회의를 거듭한 끝에 탄약고가 들어설 부지로 들어가는 길목을 막기로 했다. 그들이 길목을 막는 방식은 굉장히 전통적이었는데 납작한 돌을 하나씩 쌓는 것이었다. 트럭이 있는 주민의 도움으로 돌을 날랐다. 돌은 여러 사람의 힘으로 도로 옆에 금세 쌓아올려졌다. 산에 돌을 쌓고 소망을 빌었던 우리네 공동체의 풍습에 따라 그 탑이 무너지면 소망이 무너질 것처럼 견고하게, 주민 한 명 한 명의 손으로 아구가 맞는 돌을 끼워가며 정성으로 탑을 쌓아 올렸다.
완성된 탑은 아랫단부터 4단으로 단이 올라갈수록 폭이 좁아지는 형태였고 한 단이 대략 1미터 50cm로 총 높이는 5m에서 6m에 달했다. 하지만 소망과 원념을 꾹꾹 뭉쳐 쌓은 이 탑이 대체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그럴듯한 구경거리는 될지언정 미국 물을 잔뜩 먹은 군인들에게 무슨 힘을 발휘한단 말인가. K 씨는 이후 탑을 둘러싸고 몇 년간 끈질긴 농성과 싸움을 벌였다. (이 시간에 대해 K 씨는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아 말을 아꼈다) 동두천 시와 미군은 이 탑을 무너뜨리라고 여러 차례 경고했지만 그들은 탑을 끝내 지켰다. 소망은 이야기가 아니라 현실로 침투했다. 미군은 마을과 인접한 공여지 일부, 사실상 몇십 년간 쓰지 않아서 안 써도 그만인 땅을 조금 반환했고 주민들은 농성을 해제했다.
한편 탑은 여전히 그대로 남아 있다. 돌 표면이 적갈색으로 뒤덮였고, 식물이 타고 올라 머리카락처럼 꼭대기를 덮고 있는 것이 조금의 변화다. 어엿하게 동두천에서 손꼽히는 오리 백숙집 사장이 된 K 씨는 그때를 회상하며 우리에게 말을 남겼다.
"사실 그 탑이 그냥 보여줄라고 쌓은 게 아니에요. 탑 가운데 우리가 장치를 해뒀거든. 가운데 툭 튀어나온 돌이 있는 게 보일 거요. 고거 몇 개를 잡아당기면 돌이 도로 쪽으로 무너져내려. 그렇게 도로에 돌무더기를 엎어놓으면 탱크든 포크레인이든 일단 막을 수가 있잖아. 그러면 우리 주민들이 밤이고 낮이고 다시 몸으로 저지를 할 수 있단 말이야. 그 탑이 그런 용도예요."
K 씨는 잠시 말을 멈추고 다시 말한다.
"그러니까 무너지는 일이 없어야지. 아직도 자다가 가끔 꿈을 꿉니다. 이 땅에 탱크가 몰려오면 내가 가장 먼저 달려가서 그 돌을 빼버릴 거라고요. 내 몸으로 돌이 쏟아져서 대가리가 깨지든, 뼈가 부러져서 피떡이 되든 막아낼 겁니다."

쇠목주민에게 지워진 멍에 같은 고통의 세월이 금(今) 50년을 잊고 있으니 미군사격장, 탄약고, 훈련장 등이 주민생활을 크게 방해하는 악영향이 그것이다. 우리 선조들께서 살아온 한의 세월에 구들돌을 다듬고 난 잡석을 모아 후손들이 뜻을 합쳐 여기 탑을 조성하는 것은 통한의 시절을 회고하여 먼저가신 선조들을 위로하고 아직도 떨쳐버리지 못한 한의 사정을 풀고자 현주민들이 해원의 탑을 세운다. 2000년 춘(春) 쇠목주민 일동 돌탑에는 해원탑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옆에는 작은 비석이 세워졌다.

아가리를 벌린 용
자동차가 다리를 건너는 순간 강의 전경이 펼쳐진다. 용치는 말 없이 장엄하다. 공릉천이 흐르는 지영교 인근에는 사람 키 보다 큰 수미터 높이의 ㄴ자 콘크리트 구조물 수백기가 수백미터 강을 가로질러 정연하게 놓여있다. 방파제에 쓰는 테트라포트와 비슷한 크기와 질감이다. 아무리 봐도 자연이 만든 것이 아닌 인간의 작품이다. 용의 이빨이란 이름의 스케일을 생각하면 경외심마저 드는데,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하고 그저 공릉천 상류에서 흘러내려오는 강물을 등으로 받고만 있다. 몇 개는 자리를 이탈했고 몇 개는 부러졌다. 부러진 자리에서 다시 자랄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용치는 물론 인간보다는 짐승의 이빨을 연상케 한다. 여러 줄의 빽빽한 이빨 배치는 상어의 이빨 같기도 하다. 상어 이빨은 부러지거나 뽑혀도 평생 영구히 재생된다. 인간이 이토록 이를 열심히 닦아야 하는 이유가 지금 쓰고 있는 영구치가 없어지고 나면 다음 이가 없기 때문이라니, 나는 실시간으로 썩어가는 이를 생각하면 암담해진다. 다음이 없다는 건 늘 그렇듯 슬프다. 용치가 우리나라에서 만들어진 건 1970년대부터고 이제 용치를 쓸 일은 없다. 물론 이렇게 단언하는 건 위험하다. 용치를 써야할 날도 있을 것이다. 그전까지 치실질을 잘 하면서 썩지 않게 관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른다.
용치가 1970년대부터 만들어진 이유, 우리가 용치를 목격한 곳이 파주와 인접한 고양시였던 이유를 찾아보면 김신조가 나온다. 김신조를 아는가? 나는 청와대를 관람객에게 개방할 때도, 대통령 집무실을 용산으로 옮길 때도 김신조를 떠올렸다. 아마 여기서 청와대와 김신조를 연상하는 자와 연상하지 않는 자가 나뉠 것이다. 김신조는 대한민국의 목사였고 이 글을 쓰기 불과 6개월 전인 2025년 4월 세상을 떠났다. 목사 이전의 직업은 남파 무장공작원이었고 1968년 1.21사태의 유일한 생존자다. 1.21사태란 북한 공작원 31명 당시 대통령인 박정희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북악산까지 접근했다가 교전 끝에 29명이 사살, 1명이 미확인 된 사건이다. 이들 공작원은 개성에서 출발해 얼어붙은 임진강을 건넜고 파주군 법원리 파평산 부근을 넘어 북악산 인근까지 도달했다. 나머지 인원이 교전 끝에 사살되던 때 김신조는 독립가옥에 숨어 수류탄을 들고 항전하다 살려준다는 회유에 수류탄을 떨어뜨리고 밖으로 나와 투항했다. 김신조가 기자회견 중 한 '박정희 모가지 따러왔수다'라는 말은 전국에 방송되었다. 박정희가 이에 어떤 마음을 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이 한국의 레드콤플렉스, 북한에 대한 큰 트라우마를 남긴 것은 분명하고, 북한의 남한에 관한 본격적인 침략 의지와 적개심을 확인하는 계기가 되었다.
용치의 원형은 세계2차대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독일어 Drachenzähne이 곧 용치다. 독일-프랑스 국경의 지크프리트 선에 특히 많이 배치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밝혀지는 용치의 용도는 바로 기계화 군대, 전차 및 장갑차, 차량이 진격하는 도로에 쏟아 이동을 방해하는 장애물이다. 독일에는 정사각형이나 피라미드 모양이 많았는데 여러 열의 수키로미터로 배치된 용치를 보면 정말로 틀니 같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왜 하필 용의 이빨이라는 이름이 붙었는지는 의문이고, 때로는 히틀러의 이빨이라 불리기도 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체코는 비슷한 용도의 구조물을 고슴도치, 스위스는 토블론 초콜릿과 모양이 비슷하다고 하여 토블론이라 불렀다. 한국의 미스치프가 만든 장화같은 모양의 용치가 왜 생겼는지 또한 미스테리다. 독일에서부터 개량된 것일 수도 있고, 한국의 상황에서는 당장 도로를 막는 것이 아니라 생산하여 보관했다 사용시에 옮겨야했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동양의 용은 입에 여의주를 물고 있는 지혜롭고 상서로운 동물이지만 서양의 용은 흉폭하고 잔혹한 마신 같은 이미지다. 용치를 보고 있자니 어쩐지 서양 드래곤이 아가리를 벌리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 아가리가 수십년 존속하면서 인근에 사는 주민들에게는 어느덧 일상적인 것이 되었다. 어떤 인터뷰에서 한 주민은 용치 근처에서 친구들과 만나 놀기도 했고, 데이트를 하기도 했다고 한다. 지영교 인근 땅 위에 놓인 용치 사이사이 빈 땅에는 배추가 빼곡히 심겨져 있다. 입을 다물지 못하는 용 따위는 인간의 생명력을 이기지 못하는 모습이다. 인간이 드래곤의 이빨을 있는 힘껏 썩게 만드려고 애쓰는 것 같다. 그러나 용의 이빨은 두껍고 단단하다.
해원탑과 용치를 보고 있으면 동두천과 파주에서 전쟁과 평화를 바라보는 방식을 각각 보여준다는 생각이 든다. 동두천에는 압도적인 전쟁과 폭력의 힘에 저항하기 위해 주민들이 돌을 쌓으며 현재진행형으로 전투를 하고 있다. 파주는 역사의 숨결 위에서 이미 훌쩍 지나간 일이 질서라는 이름하에 상실되어 가고 있다. 모두 공통적으로 무언가를 안간힘을 다해 막고 있다. 두 도시는 서울의 바깥 같지만 어떤 면에서는 선두에 있다.

여행의 기억은 모두 소진되었다
5개월간 친구들과 동두천과 파주로 '장소 상실'에 관한 여행을 떠났다. 꼬리를 밟는 것 같았던 자동차는 어느새 선두에 있다. 여행을 다녀온 후 팟캐스트로 기록하자는 구조를 떠올린 건, 장소를 5명 각자의 언어로 복구하는 시도를 하면서, 장소를 경험한 인간이 기억에 무엇을 남기고 무엇을 지워버렸는지 알아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장소는 모두에게 다른 것을 남기고 다른 것을 지워버렸다. 장소는 언어로 다시 재현되었지만, 그보다 큰 구멍과 여백을 남긴다.
조르주 페렉은 1974년 3월 프랑스 파리의 생-쉴피스 광장 주변을 움직이며 자신이 본 것을 기록한다. 이 프로젝트는 <파리의 한 장소를 소진시키려는 시도>라는 이름의 책으로 출간되었다. 그는 광장에서 본 알파벳, 관례적 기호, 숫자, 슬로건, 길, 돌, 나무, 하늘, 비둘기, 자동차, 사람들, 개, 빵, 버스, 옷차림, 이동 방식, 얼굴들을 기록한다. 이 책은 의도적으로 어떤 이야기도 발생시키지 않는 듯 보인다. 각각의 사물과 동물과 사람은 아무 관련 없이 장소에 나타났다 사라진다. 인과 관계도, 상관 관계도, 작용/반작용도 없는 출현은 마치 컴퓨터가 켜져 있을 때만 존재했다가 컴퓨터를 끄면 사라지는 임시 데이터 같다. 그리고 인간의 기억도 아주 적은 부분을 남기고 모두 사라진다는 점에서, 이와 흡사하다.
다시 '장소를 소진시킨다'는 것에 대해 생각해 본다. 소진은 점점 줄어들어 다한다는 뜻인데, 조르주 페렉이 소진시키고자 했던 것은 장소가 가지고 있던 기억 혹은 이야기 같다. 광장에서 내가 쉽게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물의 목록, 이해 가능하다고 믿는 사람의 행동, 아무것도 발생시키지 않는 정보들을 텍스트로 본다. 이야기가 발생하지 않는 정보들은 통로를 만들지 못하고 금세 휘발된다. 나는 이야기를 만들기 위해 조르주 페렉의 생애에 대해 생각하고, 사물을 다른 범주를 가진 단어 안으로 통합시키고, 사물과 인물을 옆에 나란히 배치해보기도 한다. 그 정보들을 어떻게든 연결하려는 나의 시도는 실패한다. 내게 남는 건 이제 광장이 아니라 이상한 기억의 방식에 관한 것이다.
기억이 만들어지는 방식은 뇌의 어떤 정보와 정보 간 통로가 자주 활성화되는 정도에 달렸다. 감각을 통해 들어온 어떤 정보는 임시 저장되었다가 일생에 단 한 번만 연결되고 사라진다. 어떤 정보는 수많은 연결 통로를 만들면서 뇌에 자리 잡는다. 기억에는 입구도 중요하지만 입구 너머에 이미 개통된 통로가 중요하다. 새로운 통로의 개설은 쉽게 이루어지지 않고 패턴으로 연상되는 기억, 즉 익숙한 이야기가 보통의 기억을 지배한다. 인간은 자주 활성화된 통로를 쉽게 기억한다. 쉬운 통로 대신 다른 통로를 이용하기 위해서는 먼저 익숙한 통로 진입에 실패해야 한다. 조르주 페렉이 하고자 했던 일은 익숙한 기억 통로의 소진, 즉 낯선 기억 통로의 개척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내가 동두천과 파주에서 기대했던 것도 그런 종류의 이야기였다. 장소 그 자체가 장소에 얽힌 모든 기억을 초과하는 이야기! 우리는 방문자였고, 장소에 관한 이야기를 사진과 텍스트로 충분히 학습했음에도, 오히려 학습했기 때문에 기대를 박살내는 순간들을 목격했다. 동두천에서 '옛 성병진료소'를 둘러싼 수많은 기억이, 미군의 폭력성과 그들이 내놓는 달러가 부딪히는 모습을 들었다. 파주에서 전쟁이 만들어낸 땅굴과 도열한 용의 이빨을 보았다. 그 이야기가 처절하고 낡고 지저분하게 느껴진다. 돌아와서 마이크 앞에 앉아 팟캐스트 녹음을 하는 순간 나는 그 이야기의 대변자가 된다. 잘 직조된 말로 그것들을 내뱉는다. 하지만 말이 끝나고 나는 덜컥 겁을 먹는다. 내가 뭉개고 왜곡시킨 기억과, 내가 믿지 않는 이야기를 진실인 것처럼 말한 것과, 친구의 기억이 숨기고 있는 듯한 사실에 날카로워진다. 난 부글부글 끓는 상태로 녹음을 끝낸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조르주 페렉은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때 일어나는 바로 그것'(15p)에 주목한다. 익숙한 이야기가 소진되면서 남는 것들. 기억과 이야기의 전쟁은 가장 가느다란 곳, 내 안에서 시작된다. 팟캐스트에서 모든 말을 다 했다고 믿은 순간, 모든 기억을 소진시켰다고 느꼈던 순간 다른 질문이 튀어오른다. 사람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고. 다르게 말하고 싶은, 다르게 기억하고 싶은 나의 욕망. 많은 사람들에게 이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는 열망. 그러나 이 팟캐스트를 누가 들을까. 무엇을 위해 이야기하고 무엇을 위해 기록해야할까. 우리는 정말 중요한 것과 중요한 것을 구분할 수 있을까. 중요한 것과 중요하지 않은 것과의 차이 발생에 우리의 의지가 얼마나 있을까. 우리의 이야기를 누가 듣는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중요할까로 이어지는 질문들. 그런 말단의 분투는 이 거대한 현실과 정치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소진은 일시적이다. 우리가 소진시킨 이야기는 잠시 새로운 통로를 연다. 한 장소에서 열린 낯선 통로는 금세 익숙한 이야기로 뒤덮여 빛을 잃는다. 하지만 닳아서 없어진 지우개가 사라진 것이 아니고, 미생물로 분해된 사람의 육체가 사라진 것이 아니듯이, 소진된 기억도 사라진 것이 아니다. (원전 사고로 오염된 후쿠시마의 방사성 폐기물을 태워서 응원하자고 했던 일본의 캠페인이 생각난다. 태운 것은 재와 연기와 우라늄으로 분리되어, 공중에 뿌려진다) 한 번 활성화된 통로는 패턴으로 기억되며 언제든 다시 연결될 수 있다. 이전보다 훨씬 더 쉽고 강하게! 나는 그걸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