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곳

서희

추워지면 잃은 것들에 대해 생각한다. 거리의 은행나무 잎이 노랗게 되기도 전 뚝 떨어진 영하의 기온에 얇은 자켓을 여미며 걷고 있었다. 잃어버린 것들. 갖기도 전에 잃어버린 것들. 갖지 않았지만 마음을 두었던 것들. 마음을 줘 버렸던 것들. 가진 지도 몰랐던 것들. 인도 가득 밟혀 터진 은행을 간신히 피하며 묻는다. 갖지 않은 것을 잃어버릴 수 있을까.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잃다'는 단어는 열 가지 뜻을 갖는다. 예문에서 사람들은 물건도 잃고, 길도, 땅도, 사람도, 기회도, 신체도, 의식과 감정도, 상태도, 의미도, 돈과 신용도 잃는다. 우리는 반려 동물도, 자식도, 집도 잃고, 일 자리도, 건강도, 세월도, 가끔은 내가 알던 세계도 잃는다.

우리는 때로 잃어'버리기'도 한다. 모른 체 하며 그렇게 되어 버릴 때가 많다. 좋지 않은 '성격과 버릇을 떼어 없애'듯, '품었던 생각을 스스로 잊'듯, '아쉬운 감정'과 맞바꾸고, '부담을 덜'기 위해서. 잃은 것을 잊고 살아가려 애쓴다.

잃지 않은 상태는 불안하다. 잃을 수 없는 상태는 강박적이다. 잃었을 때 비로소 긴장이 해소된다. 긴장이 해소될 때 느껴지는 쾌. 단도직입적인 쾌를 위해 잃기를 선택한다. 잃어버린다.

맑고 추운 날 눈부신 햇살을 뜻하는 영어 단어가 있다. 전 직장 동료가 딱 그런 날 점심을 먹으러 가다가 말해주었다. 'Apricity'. 몰랐던 단어를 얻었다. 이제 한 겨울에 따뜻한 햇살을 느낄 때면 자동으로 이 단어가 떠오른다. 감긴 채 떨리는 눈꺼풀을 뚫는 햇살에 터지는 '아, 좋다'보다 먼저.

우리는 잃어버린 장소를 찾는다. 친구들과 '장소 상실'을 주제 삼아 동두천과 파주를 향해 리서치 트립을 한다. 여행을 한다. 프로젝트를 처음 시작하면서 거창한 말을 했다. 나는 사람들의 무의식과 욕망에 관심이 많아서 팀원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이 프로젝트를 하는 근원을 찾겠다. 리서치에는 빠지고 대중의 언어로 이야기해보겠다. 콘텐츠로 발행해서 우리 이야기를 세상에 발신하겠다. 신뢰를 잃는다.

그래도 리서치 트립을 떠날 때마다 묻는다. 우리는 왜 상실된 장소를 찾아 다니지? 왜 자꾸 장소를 상실하지? 근원을 찾지 못한다. 두꺼운 옷을 껴입은 사람들이 애워싼 지하철 출입구석에 앉아 골똘히, 나는 생각한다. 왜 자꾸 무엇인가 사라지지? 잃고 있다는 느낌에서 벗어날 수 없지? 작은 건물만한 전광판 여러 대가 빛을 내뿜는 광화문 광장을 걸으면서도 한다. 왜 잃고 나서 찾아 헤매지? 되찾을 수 없는 것을 찾지? 나는 산울림의 회상을 들으며 쓸쓸히 걷던 밤길을 떠올린다. 어두운 밤을 잃는다.

기억 속 동두천은 덥다. 늘 계획을 세우는 친구가 들를 곳을 짰다. 아무래도 좋다. 어디를 가더라도 흥미로울 것이다. 그것은 아마 함께 있는 사람들 때문일 것이다. 공주와 원주, 강릉과 봉화에서 이미 알았다. 하지만 동두천은 흥미롭다기 보다는 불편했는데, 그건 외면하고 있던 주한미군이라는 존재가 너무 크게, 실물로, 이 지역의 사람들과 산업과 삶을 뒤바꿔 버리고도 여전히 버젓하다는 것을 처음 맞닥뜨렸기 때문이다. 나는 사람들이 잃은 것과 잃고 싶지 않은 것, 되찾고 싶은 것들 사이에서 헤맨다. 우리는 땅도 잃고, 전기도 잃고, 물도 잃고, 존엄도 잃는다. 그것들을 모르던 세계를 잃고, 무엇인가 잃음으로써 무엇인가 얻는다. 나는 이제 김숨 작가의 간단후쿠를 읽는다. 끓는 속을 붙잡고 읽는다. 잃고 잊는 역사. 자신의 이야기를 들을 이를 잃은 영혼들.

파주 공릉천에는 장화같이 생긴 시멘트 덩어리가 개천을 가로지르며 일렬로 서 있다. 장갑차를 막으려는 용도를 잃은 지 오래다. 나는 장갑차가 강을 향해 돌진하는것인지는 모른 채 길게 늘어선 시멘트 표면을 짚는다. 닿기만 해도 상처가 날 것 같다. 땅을 누르며 무너진 돌들을 본다. 우그러진 용치를 보고는 한참 웃고 싶다. 풀이 표면을 모두 덮을 때까지 그저 존재 이유를 잃은 채로 있기를 바란다.